2010년 6월 28일 월요일

느림의 미학

요즘 같이 신속의 속도로 모든 것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시대에 '느림의 미학'이란 어쩌면 대단히 사치스러운 단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한번쯤 있는 시간을 쪼개서 노력을 해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들어본 음악 중에 가장 느리고 지루한 곡 중에서 그래도 듣기 좋은 곡 하나를 소개합니다.

개인적으로 브람스 이상 가는 남자의 음악(?)을 한다고 생각하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입니다.

 

 

위의 음반 자켓은 세르쥬 첼리비다케가 뮌헨 교향악단을 이끌고 연주한 실황 녹음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브루크너 8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반이지요. 가장 먼저 들었던 연주이기도 하지만, 참 친해지기 어려웠던 연주인지라 그 애정이 조금은 남다른 것 같습니다. 더구나 힘들게 구했지요. 가격도 가격이지만, 인기가 나름있는 음반이라 구하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1. Allegro Moderato (21:32)

2. Scherzo, Trio (16:05)

3. Adagio, Feierlich Langsam, Doch Nicht Schleppend (35:31)

4. Finale : Feierlich, Nicht Schnell (32:23)

 

위의 곡 러닝타임을 보면 알겠지만, 참... 깁니다. 대단히 길죠. 더구나 첼리비다케의 지휘라서 더욱 깁니다. 피에르 불레즈의 연주와 비교하면 불레즈의 브루크너 8번은 뻥 좀 보태서 댄스곡이지요.

 

1악장부터 듣기 부담스러우시면 우선 4악장부터 들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4악장의 도입부가 아주 멋드러지거든요. 뭐랄까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코끼리가 위에서 저를 밟는 느낌이랄까? 어두운 거대한 무엇인가가 저를 찍어누르는 느낌이랄까요? 음악을 감상하면서 이러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상당히 신선한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도 4악장만해도 30분이 넘어가니 이것도 사실 친해지기는 쉽지 않네요.

 

여튼 이런 류의 음악은 듣자마자 친해지기가 참 힘듭니다. 화려하지도 않고 느릿느릿하면서 무겁게 했던 말을 하염없이 반복한다고나 할까요? 더구나 그냥 음악만 듣기에는 그 시간이 너무나 길기 때문에 더욱 견디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요즘처럼 1분 안에 모든 매력을 보여주는 곡들이 널려있는 세상에 이런 교향곡들이 혈기 왕성한 젊은 세대들에게 어필되기는 참으로 힘들지요.

 

저도 이런 교향곡을 들을 때마다 일종의 '지루함'이라는 벽에 늘 한번씩 마주하는 것 같습니다.

제 경우 이런 곡과 친해지기 위한 방법이 하나가 있는 데 바로 음악을 듣는 내내 다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터넷을 하든지, 혹은 독서를 하든지 말입니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듣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보면 어느 순간부터인가 곡의 전체적인 숲이 보이는 시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늘 지겹고 무겁고 답답하기만한 음악 속에서 조금씩 호감을 가질 만한 구석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지요.

 

후후.. 참 남들이 보면 쓸데없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죠?

세상에 3분짜리 달콤한 노래가 너무나 많은데 굳이 100분에 육박하는 한 곡을 듣기 위해 이러한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 것은 대단히 비효율적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 당연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어리석게 음악감상을 하는 이유는 어떤 '한방'을 위해서입니다. 어떤 한방이냐면 뒷덜미를 강타하는 '팡!!' 혹은 '짜르르~~' 같은 한방을 먹는 즐거움이랄까요? 3분짜리 곡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아랫도리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뒤통수에서 터지는 그 한방이라는 즐거움말입니다.

 

또한, 이러한 마조히즘스러운 음악감상은 다른 종류의 음악을 듣는 것에 큰 도움이 됩니다. 뭐랄까 제가 들을 수 있는 음악의 스펙트럼을 한없이 넓혀준다고 할까나요? 세상의 모든 음악을 열린 자세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들을 수 있게 되는 촉매제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하긴 그 지겨운 100분짜리 곡이 좋게 들리기 시작하는 데 어떤 음악이 달콤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

그리고 다른 이런 매머드급의 교향곡과 친해지는 것에 대한 좋은 예방 주사가 되기도 하고요.

 

원래 몸에 좋은 약은 쓰다고 합니다. 'No pain No gain' 이라는 글구도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고요.

여러분들도 한번 도전해보시지요. 불쾌한 경험만은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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